칼의 노래
저는 어릴 적에 다른 모든 남자 아이들이 그러하듯 전쟁 영웅들을 참 좋아했었습니다. 멀리는 서방의 '나폴레옹', '한니발'부터 시작해서 가까이는 몽골의 '징기스칸',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등이 있었죠. 그러다가 삼국지에도 빠지고 일본 전국시대에도 빠져보고 하다보니 자연스레 역사광이 되었습니다. 물론, 전쟁 쪽에 한해서였지만요.
그런고로 언제쯤 한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조선, 아니 한국사 최고의 명장 이순신 장군에 대해 다룬 '칼의 노래'를 드디어 읽게 되었습니다. '칼의 노래'는 단순히 조선 최고의 명장이 침략해 온 왜적들을 다 때려 부시고 다니는 그런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전쟁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영웅이 아닌 한 개인의 고뇌를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이 밑으로는 소설의 내용과 더불어 제 개인적으로 느낀 해석을 적을 예정으로 책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이나, 내용을 미리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바로 백스페이스를 누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칼의 노래는 위와 같은 압도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은 이순신 장군이 억울한 옥살이를 끝내고 풀려나 전선으로 복귀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하는 때입니다. 이미 쉰이 넘은 나이에 각종 전투에서 얻은 크고 작은 상처와 모진 옥살이를 겪은 몸을 이끌고 전선으로 향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우리가 아는 '성웅'은 온데간데 없고 마치 비참한 일생을 겪은 노인과 같습니다. 전선으로 복귀한 후의 상황은 더욱 비참합니다. 160척에 달하는 전선을 가지고 있던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을 통해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수군을 수습하기 위해 백방으로 전선을 돌아다니며 세를 모았으나, 모인 것은 겨우 12척의 전선과 한 줌의 군세 그리고 전란에 지친 민초들 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조정에서는 수군을 해체하고 육군과 합치라는 명이 떨어집니다. 절박한 상황을 맞이한 이순신 장군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적의 적의와 적을 두려워하고 그 적과 맞서는 수군통제사가 두려운 임금을 뒤로한 채 담담하게 장계를 써 내려갑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습니다.
‥ ‥ ‥
신의 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에는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무능력한 임금이었던 선조에게는 천하가 잠재적인 적이었습니다. 임금은
장수의 용맹이 필요했고 장수의 용맹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을 죽여 사직을 보존하려 했고
또한 이순신 장군을 살려 사직을 보존하려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 끔찍한 상황 앞에서 오로지 적의
적으로써 죽기를 바랬습니다. 의미 없이 임금의 칼을 통해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가 나아가야 할 곳은 응당 적이 비워져 있지 않은 바다 위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를 이끌고 적의
330척의 전선을 맞이하여 사지인 울둘목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취합니다. 그러나 승리의 순간도
잠시, 두 개의 비보가 전달됩니다. 하나는 그의 가녀린 어머니의
죽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막내 아들 면의 전사 소식이었습니다.
나는 군무를 폐하고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환도 두 자루와 면사첩이 걸린 내 숙사 도배지 아래
나는 하루종일 혼자 앉아있었다.
고군분투하여 적들 속에서 민초는 지켜냈으나 자신의 막내 아들은
지키지 못한 이순신 장군은 송장으로 뒤 덮인 쓰레기의 바다 앞에서, 환도 두 자루와 면사첩이 걸린 숙사
내에서, 소금창고 안에서 슬픔을 느낍니다. 그러나 슬픔을
느낄 여유도 없이 매 끼니는 돌아왔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왔습니다.
국토가 살벌한 전장이 되었음에도 민초들의 삶은 계속됩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듯이, 국가가 지켜주지 못하는 영토에서도 민초의 삶은 피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국토가 회복되면 백일장이 열려 떠들썩했으며 그
와중에 식도 올렸습니다. 그런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민초를 이순신 장군은 차마 버릴 수 없었습니다. 진을 조용히 옮기려 할 때도 군사들을 막아서며 자신들을 버리지 말라며 울고 있는 민초들을 차마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가 지켜야 하는 대상은 임금의 사직이 아니라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민초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임금의 칼에 죽지 않기를 바랬고 오로지 적의 적으로 베어지기 만을 바랬습니다.
수도 근처에서 눈치만 보던 명나라 군대가 남하하면서 전쟁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강화를 바라던 명나라 군대가 남하하기 시작한 이유는 바로 적의 수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음으로 왜군들은 철수를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전투를
피하고 공만을 챙기려 하는 명나라 장수들 앞에서 이순신 장군은 간절히 항전하기를 주장합니다. 오로지
적이 있는 바다 위에서만 죽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전투를 피하려 하는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전장인 노량에서 격전이 벌어집니다. 마지막 전투는 이제까지 겪은 그 어떤 전투보다 치열하게
그려집니다. 적을 괴멸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대장 선에 붙은 적선들에서 총탄이 이순신 장군을 덮칩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 말을 내지 말라.
쑤셔 박힌 총탄을 뒤로 한 채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자연사에 안도합니다. 그리고
어린 면의 젖 냄새와 백두산 밑에서의 새벽안개 냄새, 죽은 여진의 몸 냄새와 임금의 해소 기침 소리를
느낍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마음 속 외침과 함께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오로지 적이 머물고 있는 바다 위에서 죽기만을 바랬던 이순신
장군에게 이 죽음은 오히려 평안하게 까지 보입니다.
김훈 작가가 오직 소설로만 보기 바랬던 칼의 노래는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덤덤한 문체와 더불어 이순신 장군의 수 없는 고뇌는 단순 소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다가왔었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꼭 한번 이 소설을 보길 바라겠습니다.